현대 의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바이러스 앞에서는 무기력한 인간입니다. 유행에 민감한 고닭은(?) 유행성 질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인데요. 요즘에는 공연이나 합주 이외에는 사람도 별로 안 만나는 편이라 감염경로가 많지는 않은것 같지만, 아무튼 감기에 걸렸던 거죠(물론 의심되는 경로는 있음. 동네에 커피를 한잔 사면 토스트를 무료로 주는 혜자스러운 카페가 있거든요. 맞은편에서 훌쩍 대고 쿨럭대던 사람이...하아) 일주일 동안 콧물을 흘리며 노래는 불러보지도 못하고 인간은 왜 이렇게 나약할지 괴로워하다 공연 당일이 됐습니다. 변명 같지만 누워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 시간 동안 정규앨범에 넣을 곡들을 편곡은 좀 했어요.
빵에서는 세 번째 공연인데 그동안 친구들(베이스, 드럼, 또는 드럼 선생님)을 모시고 긱을 했고, 혼자서는 처음이네요. 머릿속으로 셋리를 구성해보며 일렉기타를 둘러메고 터벅터벅 가봅니다. 저는 극강의 P로 이뤄져 있는 인간입니다. 리허설을 하러 도착했더니 사장님과 엔지니어님, 책을 읽고 있는 호영님이 보이네요. 오늘 공연자는 아닌데, 근처에 블루스 잼을 하러 왔다가 들렀다고 합니다. 같이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리허설을 해보는데 맙소사, 머릿속으로 정리해 온 셋리의 반 이상이 고음이 안 올라가서 안 되겠는 겁니다. 셋리를 다시 구성해야겠군요.
리허설을 마치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물을 하나 사고 뒤쪽의 숲길을 걸으면서 김밥을 먹었습니다. 지나가는 강아지들이 무척 귀엽습니다. 침을 흘리면서 바라보다가 돌계단 벤치에 앉았는데 뭔가가 기어가는 게 보입니다. 귀뚜라미일까, 꼽등이일지 잠시 고민하다가 클럽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의 첫 순서는 푸른새, 부드럽고 아름다운 깃을 살짝 들어 날개를 펼치는 것 같군요. 두 번째 순서는 종서라, 분위기가 노래하는 줄리안 라지같았습니다. 세 번째 순서는 이웃 신사. 듀오였는데 수제작해온 음악 노트가 인상 깊었습니다. 저도 빨리 뮤지션명함 만들어야지, 가사집 만들어야지 생각만 하는 데 이렇게 일단 하고 있는 뮤지션들을 만나면 자극이 많이 됩니다.
여전히 셋리를 생각하며 무대에 오릅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어색한 농담'을 첫 곡으로 부르고, 'Polkadots and sunbeam' 을 불렀어요. 올여름 많이 불렀던 곡인데도 오늘따라 나라는 아바타가 말을 안 듣는 느낌이네요. 세 번째로 갑자기 가사도 제대로 못 외운 산-check이라는 곡을 부르기로 합니다(데모로 만들어 묵혀뒀다가 최근에 다시 꺼내 작업 중인 곡인데 정규에 수록될 것 같습니다.). 주인의 도움 없이는 산책할 수 없는 개가 스스로 목줄을 쥐고 산책을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사가 입에 아직 붙지도 않은 주제에 갑자기 관객분들에게 같이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하는 패기는 대체(절레절레). 마음이 비단결 같은 관객 선생님들은 또 따라 불러주십니다. 저보다 훨씬 정확한 음정으로. 후렴 나오기 전 어쩌면 조금은 외로워~이 부분의 가사도 갑자기 생각 안 나서 흐릿하게 부르고 꼬리를 살랑대 (살랑살랑대), 두 귀를 쫑긋쫑긋대(쫑긋쫑긋대), 콧구멍 움찔움찔대(움찔움찔대)하는 부분도 제멋대로 부르고 말았네요. 조금은 어이없어하신 것 같지만 그래도 귀엽게 봐주신 것 같은 당신들은 천사. 에인절... 그 후로는 선데이과카몰리, 내일의 나를 부르고 무대에서 퇴장했습니다.
다음에는 완벽한 (산책하는) 개가 되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크..크흠 |